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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조진옥 — 소리의 질서, 공간의 사유

ARA KOREA 2026. 10. 29. 12:13

조진옥 제공

I. 음악의 시작, 예술가의 성장

Q1.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음악에 대한 열정과 학문적 성취가 함께했던 시절이었을 텐데요, 당시의 기억과 음악가를 꿈꾸던 청년 조진옥의 모습을 돌아본다면요?

 

대학 들어갈 때만 해도 내가 베토벤처럼 위대한 작곡가가 될 줄 알았습니다. 물론 이내 현실을 파악했지만요. 30년 전 입학 성적이 아직도 회자되는 것이 몹시 부끄럽습니다. 부디 잊어주세요.

 

Q2. 서울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셨죠. 서로 다른 학문적 환경에서 경험한 음악의 세계는 오늘날의 창작 활동에 어떤 자양분이 되었나요?

 

다른 나라의 교육환경을 경험하는 것은 무척 가치 있는 일입니다. 12년의 초중등교육과 6년의 고등교육을 받았던 습관과 관성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는 일이니까요. 그들은 어떻게 음악을, 또 세상을 바라보는지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경험하는 일은 상당히 흥미로웠습니다. 당시 피교육자로서 그리고 현재의 교육자로서 시야를 넓게 갖게 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양한 경험은 독자적 창작세계를 구축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Q3. 음악가의 삶에는 스승과 동료, 작품과의 만남이 깊은 흔적을 남기곤 해요. 자신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데 특별한 영향을 준 인물이나 경험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

 

평창동에서 현재도 연주 로봇과 씨름 중이신 이돈응 교수님이 떠오릅니다. 가장 독보적인 행보를 보여온 작곡가이자 예술가, 교육자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과 베를린에서 전자음악 밴드를 결성해 판소리와 협연을 한 일도 떠오르고, 서울역 한복판에서 강강술래를 모티브로 다원예술 공연을 한 일도 생각납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혁신하는 그분의 자세는 저뿐 아니라 많은 이에게 귀감이 된다 생각합니다.

 

II. 창작의 여정과 예술적 신념

 

Q4. ARKO와 관련된 창작 공모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접했어요. 당시 참여했던 작품과 그 시절의 기억을 들려주신다면요? 그 경험이 이후의 창작 활동에 남긴 영향도 궁금해요.

 

아르코의 지원을 받아 늘 하고 싶던 멀티채널 스피커 오케스트라를 이용한 공연을 했습니다. 설치에만 이틀이 걸리는 등 힘든 과정을 거쳤지만 무척 재미나고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24.1채널 스피커와 대금, 소리, 북이 연주하는 작품으로 당시로서도 아마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공연을 위한 멀티채널 시스템이었습니다. 이후로도 소리로 공간을 만들고 물체를 이동시키는 등 유사한 작업들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기에 시각적 요소를 더하여 다양한 창작실험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Q5. 2019년 발표한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사칼리아>와 다원예술 작품 〈緣Link〉는 서로 다른 음악적 환경에서 탄생했는데요. 관현악의 구조적 아름다움과 여러 예술 매체가 어우러지는 무대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추구한 음악적 가치는 무엇이었을까요?

 

전자음악과 어쿠스틱 작품을 둘 다 잘 쓰는 작곡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케스트라 작품을 발표하는 일은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사칼리아>는 숙제를 마친 느낌이었습니다. 緣를 통해 내 음악이 여러 종류의 다른 예술 장르와 협업하여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흥미롭고 즐거운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영상, 무용, 조명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과 의견을 나누면서 조율해가는 과정 자체가 몹시 즐거웠습니다. 멀티미디어 작품의 매력을 본격적으로 느낀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Q6. 전통음악과 관현악, 전자음향과 미디어아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활동을 이어오셨어요. 표현의 영역이 달라질 때마다 발견한 가능성과, 그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온 작곡가로서의 신념이 있다면 듣고 싶어요.

 

우리의 언어, 습관, 취향 등의 환경은 시대에 따라 달라집니다. 예술가들은 그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할 수도 있어야 하고, 그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능력도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급변하는 환경을 겨우 쫓아가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작곡가로 또는 예술가로 불릴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 정도는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III. 소리와 공간, 인간의 감각

 

Q7. 2015년 멀티미디어 음악극 <수궁가>에서는 판소리와 전통악기, 영상, 24채널 공간음향을 결합했죠. 전통예술을 동시대의 감각으로 풀어내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작품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지 궁금해요.

 

전통예술을 재구성하는 일은 매우 흥미로우면서도 예기치 못한 벽에 부딪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관성이 크게 작용하는 탓이지요. 그러나 작곡가들은 음악장르의 혁신에 있어서 최전선에 있는 그룹입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이처럼 여러 요소와 다양한 장르가 융합되어 새로운 종류의 공연이나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늘 하고 싶은 일입니다. 나라의 도움으로 상대적으로 젊은 시절에 커다란 경험을 한 것이 지금까지 예술가로서 활동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8. 다채널 입체음향과 360도 돔 환경에서는 소리가 청중을 둘러싸며 공간 전체를 음악적 경험으로 변화시키는데요, 작곡가에게 공간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요? 소리의 위치와 움직임이 청중의 감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영상과 적절한 음향이 만났을 때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면서 그 표현력이 폭발력을 갖습니다. 그러나 현재 미디어 콘텐츠 시장의 현실은 시각 위주로만 흘러갑니다. 화려한 시각 미디어를 뒷받침하는 마땅히 있어야 할 소리가 부재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더 많은 청중과 관객들이 수준 높은 즐거운 멀티미디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분발하겠습니다.

 

Q9.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작곡가에게 더욱 풍부한 음향적 가능성을 열어주었는데요. 기술로 구현할 수 있는 소리와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소리 사이에서 창작의 방향을 결정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나요?

 

예술가들은 늘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싶어 합니다. 이건 당연한 본능적 욕구입니다. 다만 확실한 원칙은 어떤 도구를 사용하든 간에 결과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고 신기한 기술의 사용이 질 낮은 창작품을 내놓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IV. INDRAVERSE, 관계를 음악으로 사유하다

 

Q10. INDRAVERSE의 <길 위의 동행>은 파편과 충돌, 중첩과 동행의 흐름을 따라 전개돼요.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모습을 간직한 채 함께 나아가는 과정을 음악과 영상으로 표현했는데요. 이 작품에서 '동행'이라는 개념을 바라본 시선과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신다면요?

 

<길 위의 동행>은 관객에게 '동행'이라는 개념을 단일한 결말의 서사가 아닌, 소리와 이미지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반응하는 변화무쌍한 감각적 공간의 경험으로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동행'이란 완전히 하나로 융합되어 고유성을 잃어버리는 일탈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결과 속도를 유지한 채,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다층적으로 공존해 나가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과정입니다. <길 위의 동행>은 갈등과 충돌을 거쳐 타자(他者)와 관계를 형성해 가는 과정을 사운드와 AI 생성 미디어의 정교한 결합으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Q11. <관계의 풍경>은 온음음계와 교회선법, 오음음계와 팔음음계 등 서로 다른 음악적 재료를 바탕으로 네 악장을 구성했죠. 각 악장의 음고 조직을 선택한 배경과 정교한 구성 속에서 자연스러운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간 과정이 궁금해요.

 

대학교 2학년 때 썼던 작품 제목과 콘셉트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늘 먹던 라면에 손이 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인상주의적 사고와 작품 창작을 좋아합니다. 네 개의 곡마다 다른 풍경을 그린 청각적 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음소재의 선택은 내 그림이 추상화가 아니라 청중이 어느 정도 형태를 유추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네 개의 곡은 풍경이 다르지만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는 설득이 될 수 있게, 일정 수준의 일관성을 갖는 작품을 구성하고 싶었습니다.

 

Q12. <관계의 풍경>에서 클라리넷과 바이올린, 피아노는 각기 다른 음색으로 하나의 음악적 풍경을 완성하는데요. 세 악기의 개성이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와, 이러한 음악적 관계가 작품의 주제와 만나는 지점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듯 악기들도 상호보완적 관계를 형성합니다. 어떤 악기가 앞으로 치고 나가면 나머지가 뒤를 받치고 하는 식입니다. 물론 갈등이 생기고 그것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V. 예술가의 삶, 앞으로의 시간

 

Q13.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음악을 창작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어요. 오랫동안 기술과 예술의 접점을 탐구해 온 작곡가로서, 이러한 시대에 인간의 감각과 상상력이 지니는 가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나요?

 

결국엔 이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또한 인간의 상상력에 달려있습니다.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탈 건지 멀리서 구경할 건지 지치길 기다렸다가 잡아먹을 건지 그건 개인의 선택입니다. 예술가들은 본인의 표현 방식에 어울리는 도구들을 선택하여 잘 다루면 될 일입니다. 카메라인 사진이 생겼지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늘 돌파구를 찾을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요.

 

Q14. 음악가의 삶에는 성취의 기쁨과 새로운 도전, 오랜 시간 작품과 마주하는 고독한 순간들이 함께 존재하죠.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가장 소중하게 남아 있는 경험을 꼽아주신다면요? 또 그 시간이 오늘의 조진옥에게 전하는 의미도 듣고 싶어요.

 

작곡 행위는 무척 고독합니다. 합주도, 합창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생각을 나누고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들은 무척 힘이 됩니다. 이 공연을 기획한 안성희 교수도 그런 동료입니다. 앞으로도 예술적 동지로서 서로의 행보를 응원하는 관계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Q15. 작곡가로서 걸어온 시간은 앞으로의 음악을 위한 바탕이기도 한데요. 현재 가장 깊이 탐구하고 싶은 음악적 화두와, 앞으로의 작품을 통해 청중과 나누고 싶은 세계를 들려주세요.

 

초고속 인터넷과 스마트 기기 등의 발전으로 대부분의 인류는 시각적 자극에 매몰되어 있는 느낌입니다. 온전히 소리만을 즐기고 소비하는 일은 무척 드물어졌습니다. 소리가 가진 기능과 매력을 전통적 방법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루트로 어필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빠르게 발전하는 AI가 인간의 예술 창조와 소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한복판에 들어가서 경험하고자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청중, 관객들과 소소하게 내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