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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백형민 몸의 기억으로 관계의 문을 열다

ARA KOREA 2026. 10. 24. 13:40

국립무용단의 시간에서 INDRAVERSE까지 한국춤의 호흡과 순환을 말하다.

사진 : Angel's Angle

 

 

무용가이자 안무가 백형민은 1995년 국립무용단에 입단해 약 20년간 무대의 중심을 지켰다. 부수석과 예술감독 직무대행을 거치며 전통춤의 깊이와 창작무용의 확장 가능성을 함께 탐구했고, 이후 춘천을 기반으로 공연과 안무, 기획과 예술감독 활동을 이어 왔다. 2018 평창 문화올림픽에서는 공연예술감독으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이끌었으며, 그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INDRAVERSE》에서 안성희 교수의 음악은 작품의 시간과 서사를 세우는 일차 창작의 토대가 되었다. 백형민은 이를 몸의 언어로 확장하는 이차 창작자로서 원방각과 굿의 미학을 바탕으로 인트로와 피날레의 안무를 구성했고, 나아가 삼차 창작자로서 조명과 동선, 공간의 흐름을 아우르며 무대의 총체성을 완성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한국무용에 입문한 첫 순간부터 국립무용단에서 축적한 시간, 《INDRAVERSE》의 무대에 새긴 호흡과 상징, 지역과 다음 세대를 향한 예술적 지향을 들어보았다.

 

사진 : Angel's Angle

 

 

I 몸에 새긴 시간 한국춤의 길

 

Q1. 1985년 한국무용에 입문한 뒤 지금까지 오랜 시간 춤과 함께해 왔는데요. 처음 한국춤과 마주했을 때의 감각과 그 만남이 삶의 방향으로 자리 잡은 과정을 들려주세요.

 

1985년 한국무용에 입문한 순간, 오래 잠들어 있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습니다. 한국 전통의 정서와 제 몸이 맞닿는 경험이었고, 저는 그것을 ‘피의 부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만의 빛깔을 찾고 다듬고 아끼는 데 긴 시간을 바쳤습니다.

춤은 제게 생각과 감각, 표현과 소통이 한데 모이는 삶의 방식입니다. 무대에서 몸의 언어가 관객에게 닿고 서로의 시간이 잠시 이어지는 순간, 깊은 생의 감각을 느낍니다. ‘나 역시 이들과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지금까지 춤을 이어 온 힘입니다.

 

Q2. 1995년 국립무용단 입단부터 주역 무용수와 부수석, 예술감독 직무대행으로 이어진 약 20년의 시간은 무용가 백형민의 몸과 예술관에 어떤 기준을 남겼나요.

 

국립무용단은 몸의 기량과 예술가의 태도를 함께 단련한 학교였습니다. 전통 레퍼토리를 거듭 몸에 새기며 장단과 호흡, 발디딤과 시선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과정을 배웠습니다. 큰 무대에서는 한 사람의 춤이 군무 전체의 흐름 속에 정확히 자리해야 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 개인의 표현과 공동의 호흡을 함께 바라보는 감각을 익혔습니다.

예술감독 직무대행을 맡았던 시간에는 무대 위 움직임을 넘어 작품 전체의 구조와 제작 과정, 동료 예술가의 언어까지 살피게 되었습니다. 전통은 완성된 형식을 보존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축적된 원리를 깊이 이해하고, 그 정신을 오늘의 감각으로 이어 갈 때 생명력을 얻습니다. 국립무용단에서 보낸 시간은 이 원칙을 몸과 현장에서 체득한 과정이었습니다.

 

Q3. 한국 전통춤의 정신을 설명하는 ‘품격의 증폭’과 ‘공감의 확산’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이 두 개념이 춤사위와 호흡에서 드러나는 모습, 그리고 동시대 무대에서 지니는 가치를 들려주세요.

 

제가 생각하는 한국 전통춤의 중심에는 품격과 공감이 있습니다. 품격은 화려한 기교의 크기보다 오랜 시간 축적된 호흡과 정신이 몸 안에서 정제되어 나오는 힘에 가깝습니다. 작은 발디딤과 시선 하나에도 살아온 시간과 내면의 질서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그 정제된 움직임이 관객의 경험과 만날 때 공감이 퍼집니다. 감정을 전면에 쏟아내기보다 절제된 움직임 속에 깊이를 담으면, 관객은 자신의 기억과 정서를 그 여백에 놓을 수 있습니다. 동시대의 공간과 기술을 만나더라도 이 중심을 지키면 전통춤의 정신은 더욱 넓고 깊게 확장될 수 있습니다.

 

사진 : Angel's Angle

 

 

II INDRAVERSE의 서막 기원의 몸짓

 

Q4. 《INDRAVERSE》의 인트로는 전체 서사의 문을 여는 장면입니다. 이 무대를 원방각 圓方角의 구현으로 풀어낸 점이 인상적입니다. 하늘과 땅, 사람의 질서를 몸으로 구성할 때 가장 마음을 기울인 대목은 어디였나요.

 

원방각은 하늘과 땅, 사람의 질서를 하나의 구조 안에 담는 상징입니다. 저는 둥근 흐름과 반듯한 축,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몸을 통해 세 존재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중심을 세우는 발디딤, 하늘을 향해 열리는 팔의 궤적, 움직임 사이에 머무는 정적을 세심하게 조율했습니다.

인트로에서 가장 중요하게 바라본 정서는 간절한 기원과 무한한 희망이었습니다. 관객이 의미를 먼저 해석하기보다 움직임의 결을 따라가며 ‘무언가를 기원하고 있구나’라는 감각에 닿기를 바랐습니다. 설명에 앞서 몸이 감각의 문을 열고, 그 문을 통해 공연의 세계로 들어가도록 구성했습니다.

 

Q5. 첫 장면에서는 한국무용의 신체, 동시대 사운드, 빛과 미디어아트가 하나의 공간에서 반응합니다. 서로 다른 매체가 만날 때 춤의 존재감과 장면의 균형을 위해 세운 원칙을 들려주세요.

 

서로 다른 질감을 지닌 예술 요소가 만날수록 각자의 고유한 언어가 선명해야 합니다. 몸과 소리, 영상과 빛이 서로를 덮어 버리면 장면의 밀도가 흐려집니다. 저는 춤이 모든 요소를 이끌려 하기보다 소리와 빛의 흐름을 듣고, 그 반응 속에서 몸의 속도와 방향, 정지의 길이를 조절했습니다.

융복합 무대의 성패는 요소의 수보다 관계의 정교함에서 결정됩니다. 각 분야의 전문성이 온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감지할 때 하나의 세계가 형성됩니다. 첫 장면에서는 신체가 공간의 중심축을 세우고, 사운드와 미디어가 그 축을 확장하도록 호흡을 맞추었습니다.

 

Q6. 인트로의 예술적 토대에는 전통 굿의 형식과 정신이 놓여 있습니다. 굿에 담긴 기원과 정화, 치유와 건넘의 의미를 오늘의 공연 언어로 옮길 때 중심에 둔 원칙은 무엇이었나요.

 

굿은 인간의 염원과 기원, 정화와 치유, 새로운 세계로의 이동을 품은 중요한 전통 예술 형식입니다. 저는 굿의 외형을 무대 위에 그대로 옮기는 데 뜻을 두기보다, 그 안에 흐르는 정신과 시간의 구조를 오늘의 몸으로 번역하고자 했습니다.

몸짓에는 간절함을, 소리에는 세계를 여는 힘을, 여백에는 감춰진 존재를 맞이하는 긴장을 담았습니다. 전통의 상징을 존중하면서 현재의 관객이 자신의 경험과 연결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무대에서 지키고자 한 핵심 원칙입니다.

 

사진 : Angel's Angle

 

 

III 피날레 씻김과 회귀의 시간

 

Q7. 피날레는 공연 전체의 에너지를 거두어 관객에게 마지막 여운을 건네는 장면입니다. ‘씻김과 승천’의 이미지 속에서 묵은 때를 씻고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춤사위에 풀어낸 과정을 들려주세요.

 

피날레에서는 공연을 지나며 쌓인 긴장과 흔적을 걷어 내고, 맑아진 존재가 새로운 공간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움직임의 힘을 바깥으로 확장하던 인트로와 달리, 피날레에서는 호흡을 안으로 거두고 몸의 무게를 천천히 비워 갔습니다.

씻김은 지워 버리는 행위보다 지나온 시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정화하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승천은 끝을 뜻하기보다 다른 차원의 시작을 향한 이동입니다. 마지막 몸짓에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평온, 그리고 다시 걸어갈 수 있는 가벼움을 담았습니다.

 

Q8. 피날레의 내면을 설명하는 ‘회심 灰心’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재처럼 고요히 사그라들어 외부의 유혹에 흔들림 없는 마음이 작품의 마지막 정서와 맞닿는 지점을 들려주세요.

 

회심은 욕망과 집착의 불길이 잦아든 뒤 남는 고요한 마음을 뜻합니다. 저는 그것을 소멸의 상태보다 불필요한 힘을 내려놓고 본질에 가까워지는 시간으로 받아들입니다. 격렬한 에너지가 모두 지나간 뒤에도 몸 안에는 아주 작은 숨과 의지가 남습니다.

피날레에서는 움직임을 크게 완성하기보다 점차 덜어 내며 그 고요에 닿고자 했습니다. 힘을 비운 몸은 약해지는 대신 더 깊은 중심을 얻습니다. 관객에게도 마지막 장면이 감정의 종결점보다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바라보는 여백으로 남기를 바랐습니다.

 

Q9. 인트로의 기원과 탄생, 피날레의 정화와 회귀는 서로를 비추며 순환 구조를 이룹니다. 이 시작과 끝의 관계는 《INDRAVERSE》가 말하는 연결의 세계와 어느 지점에서 맞닿나요.

 

인트로가 자연과 하늘을 향한 기원, 존재가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라면 피날레는 그 여정을 통과한 뒤 맑아진 마음으로 근원에 돌아가는 시간입니다. 두 장면은 멀리 떨어진 시작과 끝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호흡 안에서 서로를 완성합니다.

관계 역시 만남에서 출발해 가까워지고 멀어지며, 때로는 충돌과 고립을 지나 새로운 자리로 이동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차이를 지우는 결합보다 각자의 존재를 지닌 채 서로의 세계를 감지하는 일입니다. 기원에서 정화로, 정화에서 회귀로 이어지는 순환은 《INDRAVERSE》가 그리는 관계의 여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사진 : Angel's Angle

 

 

IV 협업과 공감 다음 세대를 향한 춤

 

Q10. 《INDRAVERSE》에서 안성희 교수의 음악은 작품의 시간과 서사를 세우는 일차 창작의 토대가 되었고, 안무는 이를 몸의 언어로 확장한 이차 창작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조명과 동선, 공간의 흐름을 아우르는 삼차 창작이 더해졌는데요. 이 세 층위를 하나의 세계로 엮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이번 작업은 하나의 예술적 구상이 서로 다른 매체를 통과하며 확장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안성희 교수는 일차 창작자로서 음악의 시간과 정서, 서사의 골격을 세웠습니다. 저는 그 음악을 몸으로 듣고 해석한 결과를 춤사위와 장면의 구조로 구성했습니다. 이것이 이차 창작의 단계였습니다.

안무가 마련된 뒤에는 삼차 창작자로서 조명과 동선, 무대 공간의 밀도까지 아우르며 장면 전체를 조율했습니다. 빛이 몸을 드러내는 각도, 움직임이 공간을 가르는 경로, 장면 사이의 전환 속도는 모두 서사를 이루는 중요한 언어입니다. 각 요소가 음악의 원형을 존중하면서 무대 위에서 한층 넓은 의미를 얻도록 설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세운 기준은 창작의 각 층위가 앞선 창작의 결을 보존하며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일이었습니다. 음악과 안무, 조명과 동선이 위계로 나뉘기보다 서로의 가능성을 확장할 때 작품은 총체적인 무대 언어를 갖게 됩니다.

작곡가와 연주자, 미디어아티스트 등 각 분야의 전문성이 온전히 살아 있으면서도 서로의 자리를 감지하도록 조율했습니다. 협업은 각자의 색을 희미하게 섞는 과정보다 서로의 색을 더욱 선명하게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Q11. 국립무용단에서 축적한 시간, 춘천을 기반으로 한 창작과 기획, 문화올림픽과 꿈의 예술단에서 이어 온 활동은 무대와 지역, 다음 세대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합니다. 앞으로 무용가이자 안무가, 예술감독으로서 더 깊이 펼치고 싶은 예술적 세계를 들려주세요.

 

앞으로도 심연에서 길어 올린 정제된 움직임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외형의 화려함보다 오랜 시간 몸과 정신에 축적된 경험, 전통의 깊이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춤을 이어 가고자 합니다. 전통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그 안에서 오늘의 움직임과 동시대의 질문을 발견하는 일이 제 예술의 중심입니다.

예술가로서 쌓은 경험을 지역과 다음 세대에 돌려주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린 예술가들이 자신의 몸과 감각을 신뢰하고, 우리 춤의 호흡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발견하도록 돕고 싶습니다. 관객에게는 거대한 결론보다 ‘그랬었지’, ‘그렇구나’라는 작은 공감이 남기를 바랍니다. 그 한마디가 서로 다른 삶을 잇는 힘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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