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년 만에 한 몸이 된 월성 비편, 석당 최남주와 그 후손들이 이어온 기록의 시간
1937년 석당 최남주가 수습한 월성 비편, 2020년 출토된 또 하나의 조각과 83년 만에 한 몸으로
경주의 문화유산을 지켜온 석당 최남주, 최정필·최정표·최정대·최정간으로 이어진 기록의 시간
발견과 보존, 교육과 연구, 국제교류로 이어진 한 세기의 여정… 영화·드라마·다큐멘터리 등 역사문화 콘텐츠로의 확장 기대
1937년, 월성에 남겨진 한 글자
1937년 6월 27일. 신라 천년 왕경의 중심이었던 경주 월성 서편에서 한 조각의 비편이 수습됐다.
돌의 뒷면에는 먹으로 쓴 짧은 기록이 남아 있었다.
‘昭和 一二 六 二七 西月城址 崔’
1937년 6월 27일, 서월성지. 그리고 마지막에 남겨진 한 글자 ‘崔’.
국가유산청은 이 묵서가 해당 비편이 1937년 6월 27일 서월성지에서 수습된 유물이며, 수습자는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직원이던 석당 최남주(石堂 崔南柱·1905~1980)였다는 점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¹
그로부터 83년이 흐른 2020년, 경주 계림~월성 진입로 구간 발굴조사에서 또 하나의 비편이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이 두 비편의 석재 산지를 공동 분석한 결과, 두 조각은 모두 경주 남산 알칼리 화강암으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3차원 스캔 결과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두 비편의 한쪽 면이 서로 합쳐지는 사실이 확인됐다.¹
1937년과 2020년.
서로 다른 시대에 모습을 드러낸 두 비편은 83년의 시간을 건너 다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이 만남에는 현대 고고학의 성과뿐 아니라 한 세기에 가까운 발견과 기록, 보존의 시간이 겹쳐 있다.
경주의 산야를 걸으며 신라 문화유산을 찾아 지켜온 한 사람, 그가 남긴 기록, 그리고 그 시간을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온 다음 세대의 이야기가 월성의 작은 돌 위에서 다시 만난다.
신라의 땅을 걸었던 석당 최남주
석당 최남주의 생애는 경주 문화유산의 발견과 보존의 역사와 깊이 맞닿아 있다.
최남주는 1925년 오늘날 국립경주박물관의 모태가 된 재단법인 경주고적보존회에 촉탁으로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서봉총 발굴 현장에 한국인으로 참여했으며, 1926년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 왕세자가 발굴 현장을 찾았을 때도 그 자리를 함께했다.²
그의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29년에는 서봉총과 쌍분을 이루는 데이비드총 발굴에 참여했고, 1932년에는 경주 원원사 석탑을 복원했다. 1934년에는 경주 남산신성비를 발견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에서 경주박물관장에 임명됐다.²
최남주에게 경주의 문화유산을 찾고 보존하는 일은 일생에 걸친 삶의 궤적이었다.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척박한 시대적 환경 속에서 신라 문화유산을 지켜내는 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실천이기도 했다. 그는 경주 일대의 문화유산을 조사하고 발견하는 데 힘썼으며, 자신이 발견하거나 수습한 유물을 사적으로 소장하기보다 박물관 등에 남겨 후대의 연구 자료가 되도록 했다. 문화유산을 개인의 수집품이 아니라 후대에 전해야 할 공동의 자산으로 바라본 것이다.¹²
이러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신념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에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사재를 들여 신라 태종무열왕릉 비각을 건립하고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우는 등 문화유산 보존에 힘을 보탰다.¹³
문화유산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지키고 후대에 전하는 데까지 자신의 삶을 이어간 것이다.
그가 평생 지켜온 원칙과 실천을 돌아보면 석당 최남주는 단순한 유물 발견자나 고고학 현장의 조력자에 머물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도 신라 문화유산의 현장을 지키고, 발견한 유물을 공공의 영역에 남기고자 했던 문화유산 수호자였다.
그의 생애와 업적 역시 경주라는 지역적 범위에만 한정해 바라보기 어렵다. 신라 문화유산의 조사와 발굴, 수습과 보존에 평생을 바친 그의 활동은 한국 근대 고고학의 형성과 신라문화 연구가 자리 잡아가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석당 최남주는 경주의 문화유산을 지킨 인물을 넘어 신라 고고학의 기반을 닦은 선구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삶의 한 장면에 1937년 월성에서 수습된 작은 비편도 자리한다.
당시 한 조각에 불과했던 돌은 오랜 세월을 지나 현대 고고학의 연구 대상이 됐고, 비편 뒷면에 남겨진 날짜와 장소, ‘崔’라는 묵서는 오늘날까지 그 수습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¹
1934년 경주 남산 식혜곡에서 석당 최남주가 발견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1935년 경주 현곡면 금장리에서 석당 최남주가 발견한 신라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¹⁴

1937년부터 석당 최남주가 신라 흥덕왕릉에서 수집·발견한 비편들. 1957년 ‘흥덕(興德)’ 명문 비편이 추가 발견돼 흥덕왕릉비임을 확인하는 중요한 근거가 됐다.¹⁵


서봉총에서 시작된 한국과 스웨덴의 인연
1926년 경주 서봉총은 최남주의 생애에서 특별한 국제적 인연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하다.
서봉총 발굴 현장에서 최남주는 당시 스웨덴 왕세자였던 구스타브 아돌프와 만났다. 이 인연은 한 번의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한국과 스웨덴을 연결하는 문화교류로 이어졌다.²
최남주는 1962년 한국-스웨덴협회를 창설했고 1971년 스웨덴 왕실로부터 바자훈장 기사장을 받았다. 1975년에는 스웨덴 왕실을 방문해 칼 구스타브 16세 국왕과 신라 토기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²
그리고 이 인연은 다음 세대로 이어졌다.
2010년 최남주의 아들 최정필과 최정대 형제는 한국과 스웨덴의 문화교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스웨덴 왕실로부터 북극성 훈장을 받았다.⁴
당시 막내 최정간은 직접 제작한 차사발 두 점을 주한 스웨덴대사와 스웨덴 국립극동박물관에 증정하며 도예를 통한 문화교류에 함께했다.⁵
1926년 신라 고분의 발굴 현장에서 시작된 한 만남이 80여 년을 지나 다음 세대의 문화교류로 이어진 것이다.
한 아버지에게서 이어진 네 갈래의 문화적 여정
석당 최남주가 평생 이어온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네 아들의 삶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어졌다.

장남 최정필은 한국 고고학과 박물관학을 아우르며 학문과 박물관 행정, 국제교류의 영역에서 활동해 온 학자다.
선친 석당 최남주가 일제강점기 신라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을 통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는 데 헌신했다면, 최정필은 그 정신을 학문적 영역으로 확장했다. 미국 피츠버그대학교에서 인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학문적 활동을 이어갔다.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박물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했고, 후학 양성과 박물관 발전에 힘썼다.³·¹⁸
한국박물관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문화재위원,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한국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또한 박물관·미술관 학예사 제도의 정착과 전문인력의 위상 강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³·¹⁸

국제무대에서도 활동을 이어갔다. 2005년에는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총회에 한국 대표단으로 참가했으며, 아시아·유럽 박물관 네트워크 관련 활동에도 참여해 두 지역 박물관 사이의 교류와 협력에 힘썼다.¹⁸
최정필은 박물관을 과거의 유물을 보존하는 공간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 세대가 역사와 소통하는 문화적 공간으로 바라보는 관점을 강조해 왔다.
학술적 관심과 집필 활동도 계속되고 있다. 2025년에는 아메리카 원주민 문명의 역사와 이동, 생존과 디아스포라를 고고학·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적 관점에서 조명한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을 출간했다.¹⁹
석당 최남주가 경주의 문화유산 현장에서 발견과 보존의 길을 걸었다면, 장남 최정필은 그 유산을 고고학과 인류학, 박물관학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한국 박물관의 학문적·제도적 발전과 국제교류에 참여해 왔다.
둘째 최정표는 고향 경주의 교육 현장에서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를 다음 세대에 전하는 길을 걸었다.
역사교사로 오랜 기간 교직에 몸담았으며 선덕여자중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재직 당시 선덕여중에서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문화유산 가꾸기와 우리 고장 뿌리 알기, 문화재 지키기 등의 활동이 이루어졌다.⁶
선덕여자중학교 재직 시절 제자 가운데에는 훗날 ‘갈색추억’으로 널리 알려진 가수 한혜진도 있었다.
정년 이후에도 최정표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다. 경주고도보존회 경주지부에서 활동하며 경주지역 신라 문화유산의 보호와 보존을 위한 민간 활동에 참여했다. 관련 기록에서는 경주고도보존회 경주지회장으로 활동한 사실도 확인된다.⁷
교실에서 신라의 역사를 가르쳤던 교육자의 길이 정년 이후에는 고도 경주의 문화유산을 지키는 시민사회의 활동으로 이어진 것이다.
셋째 최정대는 국제교류와 영문 기록을 통해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길을 걸었다.
코리아타임스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1979년부터 2025년까지 46년간 한국의 역사와 문화, 외교와 국제교류에 관한 영문 칼럼을 집필했다.
2026년에는 이 가운데 110편을 선별해 『문화의 가교: 코리아타임스 칼럼집』을 출간했다. 책에는 외교사와 한국학, 종교 간 대화, 신라 문화유산, 문학적 성찰 등 다양한 주제가 담겼다.⁸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영어로 기록하고 해외 독자에게 전달해 온 그의 활동은 1926년 서봉총에서 시작된 가족의 국제문화교류가 글과 출판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진 사례이기도 하다.


현암 최정간, 도자와 30년 연구로 이어간 한차 문명의 기록
막내 현암(玄菴) 최정간(崔楨幹)은 도예와 차문화 연구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화적 기록을 이어왔다.
그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차문화를 30여 년간 연구하고 그 결과를 『韓茶文明의 東傳』으로 집대성했다. 관련 보도는 최정간을 도예가이자 오랜 기간 동아시아 차문화의 전파 과정을 연구해 온 연구자로 소개하고 있다.⁷·⁹·¹⁰
최정간의 연구에서 중요한 인물은 매월당 김시습이다.
그는 중국에서 형성된 선차문화가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렀으며, 15세기 매월당 김시습이 경주 남산 용장사 초암에서 이를 새로운 형태의 초암차로 발전시켰다고 보았다.
특히 김시습의 초암차 정신이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와비차와 다도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를 제시했다.¹⁰·¹¹
이는 최정간이 30년에 걸친 한·중·일 문헌자료 조사와 현장답사를 토대로 제시한 연구 견해다.
그의 연구는 책이 출간되기 훨씬 전부터 이어졌다.
1988년 강원대학교에서 열린 매월당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최정간은 ‘일본 무로마치시대의 초암차에 끼친 매월당의 영향’을 주제로 논문을 발표했다. 김시습의 문학이나 종교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김시습과 일본 다도문화의 관계를 학술적 주제로 제기한 것이다.¹⁰
『韓茶文明의 東傳』에서는 김시습과 일본 승려의 교류, 조선 다완의 일본 전래, 한국의 차문화와 일본 다도문화 사이의 관계 등 한·중·일 문화교류의 여러 문제를 문헌과 현장조사를 바탕으로 다뤘다.¹⁰

이어령이 주목한 최정간의 연구
최정간의 연구는 당시 문화계에서도 주목받았다.
이어령은 최정간이 제시한 김시습의 초암차와 일본 와비차의 관계에 관한 해석을 두고 ‘창의적인 탁견’이자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학설’이라고 평가한 것으로 당시 보도는 전한다.¹⁰
최정간은 김시습의 초암차가 일본으로 전해져 잇큐, 무라다 슈코, 센노리큐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 와비차와 다도문화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를 제시했다.¹⁰·¹¹
이는 일본 다도의 기원을 하나의 단선적인 관계로 확정한 것이 아니라, 한·중·일 사이에서 이루어진 차문화의 이동과 변용을 문헌과 현장조사를 통해 추적한 최정간의 연구 견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일보 역시 2012년 『한차 문명의 동전』 출간을 소개하면서 최정간이 신라에서 이어진 선차문화와 김시습의 초암차, 일본 다도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차문화의 전파 과정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고 보도했다.¹¹
최정간에게 이러한 연구의 출발점은 고향 경주와 아버지 최남주였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경주의 산야와 신라 문화유산 현장을 접했던 경험은 훗날 차문화와 도자문화 연구로 이어졌다. 관련 인터뷰에서 최정간은 경주라는 문화적 환경이 자신의 연구에 미친 영향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⁷
도예가로서의 활동 역시 국내외로 이어졌다.
현암 최정간의 달항아리 작품 〈고향의 달〉은 2011년 자선경매를 통해 당시 호텔프리마 대표였던 이상준 회장이 낙찰받아 소장하게 됐다.¹⁶ 이상준 회장은 고미술품과 현대미술품을 폭넓게 수집해 온 컬렉터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더프리마 아트센터를 통해 미술문화 활동을 이어왔다.
최정간의 또 다른 작품은 호주 국립미술관에 소장·전시된 것으로 소개됐다.⁷ 그의 작품이 국내 개인 컬렉션을 넘어 해외 미술관으로 이어졌다는 점은 도예가로서의 활동 영역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최남주가 경주의 땅에서 문화유산을 발견하고 기록했다면 최정간은 흙과 불로 이루어진 도자와 수십 년에 걸친 연구를 통해 문화와 기억의 시간을 이어왔다.
서로 다른 길에서 이어진 기록
최남주와 네 아들의 삶을 함께 바라보면 하나의 흐름이 드러난다.
최남주에게 문화유산은 발견과 보존의 대상이었다.
최정필에게는 고고학과 박물관으로, 최정표에게는 역사교육과 고도 보존으로, 최정대에게는 국제교류와 영문 기록으로, 최정간에게는 도예와 차문화 연구로 이어졌다.
각자가 걸어간 분야와 방법은 달랐지만 그 중심에는 경주와 신라문화,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려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
특히 최정필과 최정대가 스웨덴 왕실의 북극성 훈장을 받고 최정간이 직접 제작한 차사발을 스웨덴 측에 전달한 장면은 1926년 서봉총에서 시작된 최남주의 인연이 다음 세대에서도 문화교류의 형태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⁴·⁵

83년의 시간을 이은 현대 고고학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유산 조사에는 최남주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과학적 분석과 디지털 기술이 더해졌다.
2020년 월성에서 또 하나의 비편이 출토된 뒤 두 비편의 관계를 밝히기 위한 정밀조사가 진행됐다.
석재 산지 분석을 통해 두 비편이 모두 경주 남산 알칼리 화강암으로 제작된 사실이 밝혀졌고, 3차원 스캔 결과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두 비편의 한쪽 면이 실제로 서로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¹
1937년의 기록, 2020년의 발굴, 그리고 현대의 과학적 조사 기술.
서로 다른 세 시대의 시간이 하나의 비편 위에서 만났다.
2026년 4월 13일 국립경주문화유산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은 두 비편이 하나로 합쳐진 모습을 특별 공개했다.¹
그 자리에는 신라 왕경 월성이 품었던 고대의 시간, 1937년 최남주가 비편을 수습했던 시간, 2020년 또 하나의 비편이 발굴된 시간, 그리고 두 조각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다시 연결한 오늘의 시간이 함께 놓였다.
신라 천년에서 오늘까지 이어지는 서사
월성 비편과 석당 최남주를 둘러싼 기록에는 여러 시대와 인물이 겹쳐 있다.
신라 천년 왕경의 중심 월성이 있고, 근현대로 접어들면 경주의 문화유산 현장을 누빈 최남주가 등장한다.
1926년 서봉총에서는 스웨덴 왕세자와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1937년 월성에서 수습된 비편 뒤에는 날짜와 장소, 그리고 ‘崔’라는 기록이 남았다.
그 뒤를 이어 최정필은 학문과 박물관, 최정표는 역사교육과 문화유산 보존, 최정대는 국제교류와 영문 기록, 최정간은 도예와 차문화 연구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2020년 월성의 땅에서 또 하나의 비편이 모습을 드러냈다.
83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수습된 두 비편은 석재 분석과 3차원 스캔을 거쳐 다시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¹
역사문화 콘텐츠로 확장되는 기록의 가치
월성 비편과 석당 최남주 가족을 둘러싼 기록에는 여러 시대와 장소, 인물이 교차하는 풍부한 역사문화 서사가 담겨 있다.
신라 왕경 월성과 서봉총, 일제강점기의 경주 문화유산 현장, 1926년 스웨덴 왕세자와 최남주의 만남, 1937년 월성 비편에 남겨진 묵서, 네 아들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어진 문화적 유산, 2020년의 발굴과 83년 만의 재결합까지 한 세기에 가까운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러한 기록은 한 가족의 역사에 머물지 않는다.
한 시대의 문화유산을 누가 발견하고 기록했는지, 그것을 누가 보존했으며 다음 세대가 어떤 방식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세계에 전달했는지를 보여주는 근현대 문화사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 안에는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역사문화 콘텐츠로 확장할 수 있는 서사적 가능성도 존재한다.
1926년 서봉총 발굴 현장, 스웨덴 왕세자와 한국인 문화유산 지킴이의 만남, 일제강점기의 경주, 1937년 월성의 비편,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다음 세대, 그리고 83년 뒤 다시 하나가 된 두 조각.
시간을 뛰어넘어 연결되는 사건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긴 이야기를 이룬다.
1937년 6월 27일.
월성에서 수습된 작은 돌의 뒷면에는 날짜와 장소, 그리고 한 글자가 남았다.
‘崔’.
그 한 글자에 담긴 기록은 사라지지 않았다.
83년 뒤 땅에서 모습을 드러낸 또 하나의 돌과 만나면서 과거의 한 순간은 다시 현재의 역사가 됐다.
누군가는 발견했고, 누군가는 기록했다. 누군가는 가르쳤고, 누군가는 연구했다. 또 누군가는 그 문화를 세계에 알렸고, 누군가는 예술로 남겼다.
발견은 역사의 한 순간을 열고, 기록은 그 순간에 시간을 부여한다. 보존은 그 시간을 다음 세대로 건넨다.
83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된 월성의 두 비편은 그렇게 신라 천년의 시간과 한 세기에 걸쳐 이어진 사람들의 기록을 오늘의 우리 앞에 다시 펼쳐 보이고 있다.
주석 및 참고자료
- 국가유산청, 「1937년과 2020년 경주 월성 수습 비편들(돌비석 조각) 원래 하나였다」, 2026. 4. 13. 1937년 월성 비편의 묵서와 수습 경위, 2020년 출토 비편, 석재 산지 분석 및 3차원 스캔을 통한 두 비편의 접합 사실을 다룬 공식 자료.
국가유산청 공식 발표 - 연합뉴스, 「신라문화재 발굴·보존에 일생 바친 최남주」, 2008. 10. 20. 석당 최남주의 경주고적보존회 활동, 서봉총·데이비드총 발굴 참여, 원원사 석탑 복원, 남산신성비 발견, 경주박물관장 임명 및 스웨덴 왕실과의 교류 등을 소개한 기사.
연합뉴스 기사 - 문화체육관광부, 「국립박물관문화재단 이사장에 최정필 세종대 명예교수 임명」, 2018. 1. 24. 최정필의 세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박물관장, 한국박물관학회 회장, 국제박물관위원회 한국위원장 등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 자료.
문화체육관광부 자료 - 동아일보, 「신라금관이 맺어준 韓-스웨덴왕실 2代 인연」, 2010. 7. 21. 1926년 서봉총에서 시작된 최남주와 스웨덴 왕실의 인연 및 최정필·최정대 형제의 스웨덴 북극성 훈장 수훈을 다룬 기사.
동아일보 기사 - 경남신문, 최정필·최정대 형제의 스웨덴 왕실 훈장 수훈과 현암 최정간의 차사발 기증 등 최남주 가족과 한국·스웨덴 문화교류에 관한 기사.
경남신문 기사 - 경북매일, 「선덕여중 화랑봉사단 장애인복지기관 성금전달」, 2005. 4. 15. 최정표 교장 재직 당시 선덕여자중학교에서 진행한 ‘문화유산 가꾸기’, ‘우리 고장 뿌리 알기’, ‘문화재 지키기’ 등의 교육활동을 확인할 수 있는 기사.
경북매일 기사 - 경주신문, 「출향인 인터뷰19-도예가 현암 최정간」, 2012. 최정간의 성장 과정과 경주·석당 최남주의 영향, 30여 년에 걸친 한·중·일 차문화 연구, 『韓茶文明의 東傳』, 도예 활동과 해외 전시·소장, 최정표의 경주고도보존회 활동 등을 소개한 인터뷰.
경주신문 인터뷰 - 뉴시스, 「신라부터 K컬처까지 46년 민간 외교 담은 칼럼집…‘문화의 가교’」, 2026. 5. 12. 최정대가 1979년부터 2025년까지 코리아타임스에 기고한 영문 칼럼 가운데 110편을 선별해 『문화의 가교』를 출간한 사실과 그의 국제문화교류 활동을 소개한 기사.
뉴시스 기사 - 매일경제, 현암 최정간의 30여 년에 걸친 한·중·일 차문화 연구와 『韓茶文明의 東傳』 출간을 소개한 기사.
매일경제 기사 - 뉴시스, 「현암 최정간 ‘한차 문명의 동전’ 출간해 ‘눈길’」, 2012. 6. 26. 최정간의 30년간 한·중·일 차문화 연구, 1988년 국제학술회의 발표,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와 일본 와비차의 관계에 관한 연구 및 이어령의 평가 등을 소개한 기사.
뉴시스 기사 - 한국일보, 「日 다도의 출발은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 2012. 6. 26. 최정간의 『한차 문명의 동전』 출간과 매월당 김시습의 초암차, 일본 와비차 및 다도문화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 기사.
한국일보 기사 - 대한경제, 석당 최남주의 임신서기석 발견과 문화유산 수습·보존 활동에 관한 자료. 최남주가 자신이 발견하거나 수습한 문화유산을 사적으로 소장하지 않고 박물관과 대학박물관 등에 남긴 활동을 소개한다.
대한경제 관련 자료 - 경주신문, 「신라의 얼 찾아 한평생, 석당 최남주 선생」.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최남주가 사재를 들여 태종무열왕릉 비각을 건립하고 석탈해왕릉 비석을 세우는 등 신라 문화유산의 보호와 보존에 힘쓴 활동을 다룬 자료.
경주신문 관련 자료 - 高爭爭, 「‘壬申誓記石’ 재연구-트랜스 동아시아의 시각으로」, 『아시아연구』 제27권 제1호, 2024, 265~286쪽. 임신서기석의 발견 경위를 재검토하고 1935년 최남주의 발견 기록을 다룬 학술논문.
KCI 논문 정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고대사료DB, 「경주 흥덕왕릉 비편」. 1937년 최남주가 7개의 비편을 수집해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기증한 사실과 1957년 민영규·최남주가 9개의 비편을 추가로 발견한 사실, 그 가운데 ‘흥덕(興德)’ 명문 비편이 포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한국고대사료DB 자료 - 매경ECONOMY, 현암 최정간의 달항아리 작품 〈고향의 달〉이 2011년 자선경매에서 당시 호텔프리마 대표였던 이상준 회장에게 낙찰된 사실을 소개한 기사.
매경ECONOMY 기사 - YTN, 현암 최정간의 도예 및 문화 관련 활동을 소개한 기사. 최정간 관련 보조자료로 활용했다
YTN·네이버뉴스 기사 - 세종대학교 뉴스룸, 「역사학과 최정필 명예교수,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부활의 디아스포라’ 출간」, 2025. 10. 16. 최정필의 피츠버그대학교 인류학 석·박사 학위, 세종대학교 교수·박물관장·대학원장 경력, 한국박물관학회 회장, 국제박물관협의회 한국위원장, 유럽·아시아 박물관 관련 국제기구 부회장 등의 활동을 소개한 대학 공식자료.
- 최정필,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부활의 디아스포라』, 주류성출판사, 2025. 9. 11. 고고학·인류학·지질학·유전학 등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기원과 이동, 역사와 문명을 조명한 저서.
https://pr.sejong.ac.kr/news/people/faculty.do?articleNo=857910&mode=view
역사학과 최정필 명예교수,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역사학과 최정필 명예교수, '아메리칸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서사로 기록된 생존과 부활의 디아스포라' 출간 2025.10.16 1354 ▲표지 ▲최정필 명예교수 역사학과 최정필 명예교수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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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인디언, 끝나지 않은 문명의 여정 | 최정필 | 주류성 - 예스24
동북아시아에서 비롯한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긴 여정을 고고학, 인류학, 지질학, 유전학 등 수십 년간 축적된 연구를 바탕으로 추적한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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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료정리 | ARA KOREA 역사문화기록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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